야니 스타브라카키스는 라클라우의 제자로 알려져 있고 라클라우와 무페는 그 유명한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의 공저자다.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원제는 라캉과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실 라클라우의 급진적 민주주의를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반복한 것이며 따라서 당연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과도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정치적인 것"에 대한 공유는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라는 저서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차이라면 라캉과 정치가 유토피아 정치의 구체적 사례로서 주로 파시즘을 다루는 것과 달리 민주주의의 역설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탈정치성과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을 가상illusion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라캉에 대한 해석을 축으로 보다 정교한 이론적 전선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둘째 문제고 나꼼수와 안철수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 책의 자유민주주의 비판은 그 자체로 큰 가치가 있다. 1. 체코 처음으로 밟은 외국 땅이 체코였다는 것은 운이 좋은 일이었다. 프라하는 우리가 유럽을 떠올릴 때 흔히 상상하게 되는 이미지들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도시였다. 도시를 관통하는 아름다운 강과 오랜 시간 보존되어 온 옛 양식의 건축물들, 곳곳에 남아 있는 조각상은 내 시선이 닿는 매 장면을 사진으로 만들었다. 그 이국적인 풍경은 평소 여행에 대한 호들갑스러운 사회적 과대 포장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도 약간의 설렘과 흥분을 주었다. 그런 외부적인 풍경과 함께 또한 생소하게 다가왔던 것은 다름 아닌 소수 인종으로서의 자각이었다. 한국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나는 언제나 다수에 속해 있었고, 당연하게도 다수 인종으로서의 자각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중심과 주변의 시선 전환은 오로지 자신이 주변의 측에 섰을 때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 자신을 제삼자의 시선 안에서 낯설게 대상화시킨다. 나는 단지 동양인인 것이 아니라 서양인이 바라보는 동양인이었고 내 존재가 누군가의 시선 속에 하나의 상으로 맺혀진다는 것은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가 체코에 간 목적은 고급 양복을 입고 가죽 냄새와 커피향이 섞여 있는 사무실에 앉아 회사의 미래가 달려 있는 중대한 사항을 협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대신 나는 잘생긴 체코 청년들과 발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정직하고 묵묵한 노동의 시간을 보냈다. 첫날이라 미숙한 점이 많았고 내가 허둥대는 동안 낙천적인 체코 청년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수다를 떨었다. 필요한 인력보다 많은 사람이 오기도 해서 아마도 그들에게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돈벌이였을 것이다. 저녁에는 법인 사람들과 한국 식당에서 술을 먹었다. 한국 사람마저 외면할 법한 인테리어의 그 식당에는 안젤라라는 이름이 어울릴 법한 예쁜 체코 아가씨가 어설픈 한국어로 손님을 맞고 주문을 받았다. 그 뒤로는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데 정말 끔찍한 것은 내가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호텔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때부터 사경을 헤매며 긴 밤을 보내야 했다. 그 와중에 예쁜 백인 소녀가 등장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은 서양 여성에 대한 내 성적 욕망의 발로가 분명했다. 다음날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며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루의 반을 침대 위에서 보내야 했다. 내가 왜 지구 반대편에서까지 이러고 있나 생각하니 화가 났다. 인간을 아홉 개의 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면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며 자신의 간 기능을 과시하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인간이 9등급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게나 걸어 당도한 카를교와 프라하성은 생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들인지 알까 궁금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나 부정하는 사람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나라의 닭장처럼 생긴 높고 네모난 시멘트 건물들을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루 만에 뒤집어졌는데 이튿날 도시를 거닐고 있자니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었다.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는 거기에서 폐쇄된 반복의 답답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라하는 밀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매일 되풀이되는 관광도시다. 모든 것이 역사의 유물인 그곳에서는 도시가 사람의 배경이 되지 않고 사람이 도시의 배경이 된다. 그곳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도시 그 자체다. 시간이 멈춰버린 거대한 역사의 조그만 일부가 된다는 것은 관광객들의 환상만큼 그리 멋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2. 네덜란드 출장 전 소집된 회의에서 처음 P를 만났다. 나는 내 또래 사내들을 싫어하기 때문에 연배 높은 그와 동행하는 게 내심 기뻤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동료 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영리함을 남에게 보여주며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이었고 그런 타입이 흔히 그러하듯이 내가 어떤 실수를 할 때마다 과장되게 웃으면서 핀잔을 줬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된다는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내 머릿속에 완벽한 영어 문장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나를 전장의 일선으로 밀어 넣고 자신은 한 발짝 물러나 뒷짐을 지고 있기 일쑤였다. 그러고는 뒤에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잘못됐고 어떻게 해결하면 되는지를 명확한 한국어로 얘기해줬는데 뻔뻔하게도 그 말투에는 자신의 영리함과 나에 대한 답답함이 묻어 있었다. 물론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런 식의 태도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그것은 혼자서는 당장 국제 미아가 될 사람이 자신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에게 보일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암스테르담은 프라하와는 달리 현대화가 잘 되어 있는 도시였다. 비행기 내부와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부터 깔끔한 인상을 줬고, 널찍널찍 세워진 건물들과 도로는 크고 반듯했다. 새벽에 일어나 Y의 차를 타고 안개가 많이 낀 도로를 달렸다. 창문 밖으로 끝없는 평지가 펼쳐졌다. Y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 말을 할 때는 굉장한 달변가였다. 이동 중 네덜란드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들려줬는데 그것만으로 네덜란드의 모든 것을 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전 중으로 일을 끝내고 법인을 방문했다. 잘생기고 예쁜 현지 직원들이 스타일리쉬한 옷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세련된 디자인의 건축물 안에서 일을 하는 모습은 어딘가에서 봤던 외국 광고를 떠올리게 했다. 정작 물건을 만드는 것은 개발자인 우리지만 그 화려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그리고 추울까봐 입고 간 내 후줄근한 점퍼를 보고 있자니) 순간 나 자신이 저들을 위해 일하는 아시아 노동자 중 한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밥을 먹으면서 Y는 네덜란드인들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에 대해 얘기했다. 이들은 한국인처럼 각박하게 살지 않는다고, 그러면서도 더 많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이들이 좁은 땅에서 아등바등 사는 한국인을 보면 참 웃길 것이라고 얘기했다. 네덜란드인들의 웰빙 라이프라면 암스테르담 근처의 교외 도시를 한 시간 정도 걸어 다니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참이었다. 녹지와 호수와 전원주택이 그림 같이 예쁘게 어우러진 곳에서 노인이 산책을 하거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하는 모습이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Y는 네덜란드의 작은 임금 격차와 발달된 보험제도, 높은 교육 수준과 낮은 강력범죄율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특히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는 네덜란드의 부모와 성인이 되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는 네덜란드의 건실한 청년들에 대해 얘기하며 한국 사람들의 잘못된 의식을 꼬집었다. 그런데 의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가족을 중시하는 비정상적 의식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가족이라는 경제적 단위의 비정상적 중요성에서 나온다. 가족은 협업에 필요한 인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원시적인 경제적 교환 관계에 그 기원을 둔다. 우리는 이 원시성을 현대의 가족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희생적으로 투자하고 부채의식(한국인은 이것을 효라고 부르지만)을 가진 자식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경제적 교환 관계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근간이다. 자식이 아니면 노후를 보장 받지 못하고, 부모가 아니면 미래를 보장 받지 못하는, 그래서 이 원시적인 야생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향해 의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순진무구한가. 그 말은 은퇴를 하면 든든한 연금으로 노후를 보장 받는 네덜란드의 부모와 달리 자식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한국 부모의 의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혹은 그 말은 적성에 맞는 일을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네덜란드의 청년과 달리 하루하루 낙오의 공포를 느끼며 토익과 고시 서적을 뒤적여야 하는 한국 청년의 의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가족의 원시적인 기능을 사회가 분담하여 떠맡는 데 민주적으로 합의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그러나 나는 마냥 부러움만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부자가 빈자를 필요로 하듯이 대부분이 잘사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대부분이 못사는 사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이 세상의 발전이란 결국 양자의 간격을 벌리고 그 사이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었는가? 한 편의 추함과 고통이 어떤 경로를 거치고 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그저 예쁘고 편리한 상품의 형태로 진열되고 그것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기만 하면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시장이라고 부르는 저 알 수 없는 경로에 불합리와 폭력은 없는가? 아니면 불합리와 폭력은 인간의 추함을 "눈에서" 감추어간 모든 역사처럼 단지 유통 과정에서 보기 좋게 포장되었을 뿐인가? 이런 편협하고 불순한 생각을 하면서 거기서도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다른 인종"을 보고 있자니 나는 다만 울적하고 씁쓸할 뿐이었다. 3.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마침내 공황증이 찾아왔다. 출장 내내 비행기를 타면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좀 심했다. 현기증에 읽던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은 비행기 추락 사고를 전하는 내일 뉴스 헤드라인과 신문 일면들로 채워졌다. 안정을 찾기 위해 엷은 미소를 띤 스튜어디스의 표정에서 일상성을 탐색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이 지금 이대로 땅으로 곤두박질 쳐 흔적 없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몇 만 피트 상공에서 웃으며 커피를 따라주는 일을 내가 혹시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내 직업이 아니라 지옥에서의 형벌일 것이다. 스웨덴을 생각할 때 나는 렛미인의 을씨년스러움을 우선 떠올렸는데 실제 스웨덴이 그랬다. 도시 전체가 무채색으로 보였고 저녁이 채 되기도 전에 해가 졌다. 호텔에서 막 짐을 풀었을 때 법인 직원인 H가 찾아와 우리를 한국 식당으로 안내했다. H는 호남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가 작업할 곳이 스톡홀름에서 400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는 없고 현지 직원들과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현지 직원인 D와 T가 호텔로 찾아왔다. 흙이 잔뜩 묻은 경차를 끌고 왔는데 장거리 운행에는 적합하지 않은 차였다. D는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고 T는 놀랄 만큼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동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D가 운전하는 동안 나는 주로 잠을 잤고 가끔씩 창밖으로 북유럽의 높고 뾰족한 나무들을 구경했다. 사실 스웨덴에서 처리할 일이 가장 많았는데 D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더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D는 우리 회사에 오래 근무한 탓인지 그런 면에서는 어느 정도 한국화가 되어 있었다. 첫째 날 일을 끝내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D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우리나라와 일본 회사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애사심도 그가 나보다는 많아 보였다. 이튿날도 강행군이었다. D는 시종일관 성실했고 T 역시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P와 나는 한국인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한 결과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일을 끝냈다. 한국인과 한국화된 외국인 네 명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보여주었다. 스톡홀름으로 돌아와 H가 안내해주는 대로 구시가지와 멜라렌 호수 주변을 둘러봤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과거와 현대의 건축물이 조화롭게 어울렸고 멜라렌 호수변의 야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H는 밤늦게까지 해가 지지 않는 스웨덴의 여름은 천국 같다고 말하며 우리가 겨울에 온 것을 아쉬워했다. 나도 그것이 아쉬웠다. 기회가 되면 스웨덴과 핀란드를 오간다는 유람선을 타보고 싶었지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내가 이번 유럽 방문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생각하니 새삼 놀라웠다. 나는 더 이상 유럽을 동경하는 낭만적인 소년이 아니었다. 해외에 나가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는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번 경험이 그나마 남아 있던 유럽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는 기회가 되었을 뿐이다. 방문 목적이 출장이 아니라 여행이었어도 상황이 크게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게 여행은 관광 이상의 의미는 없다. 누군가는 골방에서 책을 읽을 시간에 밖에 나가 세계를 경험하라고 한다지만 나는 반대로 쓸 데 없이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닐 시간에 제대로 된 책 하나를 읽으라고 권유하고 싶다. 출장을 다녀온 뒤로 3주 동안 야근을 했다. 주말에도 하루는 일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늦은 밤에 들어와 잠이 드는 미친 짓을 생각 없이 반복하고 있다. 나는 이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위안부적인 예능을 보며 스트레스를 푸는 한국인들의 일상을 이해한다. 문화라는 것은, 혹은 예술이라는 것은 귀족이나 한량들이 즐기고 발전시키는 것이지 개미굴 같은 곳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천박함은 GNP를 몸으로 때워 높이는 경제적 배경에서 나오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하루 동안 누적된 피로를 풀어줄 정신적 창녀들, 혹은 배설구이다. 어쨌든 나는 이 미친 짓을 묵묵히 잘 해내고 있다. 내 하루에서 C언어로 컴퓨터와 대화를 나누는 일을 빼고 나면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는 기상과 저절로 눈이 감기는 취침이 접붙여진 단순한 형태가 되고, 그래서 매일 아침 알람을 끌 때마다 사랑의 블랙홀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놀랍게도 나는 이 생활에 조금씩 적응을 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소프트웨어, 정확히는 임베디드인데 불행히도 내 전공과 딱 맞는 일이다. 아주 끔찍했던 내 전공과목들 중에서도 가장 싫어했던 프로그래밍으로 밥을 벌어먹게 된 걸 보면 진짜 피하고 싶은 악몽은 이불 밑으로 꾹꾹 눌러 담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더 큰 저주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비유가 과하다 싶지 않을 정도로 처음 몇 달간 일을 배우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나름대로 아주 열심히 했고, 옛말처럼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이 일이 싫지만 어떻게 보면 이보다 나와 더 어울리는 일은 없는 것도 같고, 아무렇게나 살아온 내 인생이 언제나 최악만은 피해가는 걸 보면 난 참 운이 좋은 놈인 것도 같다. 결국 내가 원하는 직업이란 조용한 도서관을 정갈하게 정리한 뒤 저녁까지 책을 읽다가 붉은 노을을 보며 퇴근하는 것인데 세상에 그런 일에 보수를 줄 사람이 없는 이상 나는 지금의 내 직업에 큰 불만이 없다. 하지만 애사심이라든가 소속감 같은 것은 이 끈끈한 유대감 중심의 조직 문화 속에서도 조금도 피어나지 못했다. 나는 어디서나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주변인이며 노동을 돈으로 환전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회사에 부여하지 않는다.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책임감과는 거리가 멀며 다만 내가 자리를 빼앗은, 틀림없이 나보다 훨씬 더 이 자리에 어울렸을 사람을 조금이라도 대체하기 위한 노력에 더 가깝다. 나 자신이 흙탕물에 빠져 허덕이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쉬워도 나로 인해 누군가의 옷에 흙탕물 한 방울이라도 튀는 것은 천성적으로 싫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정말이지 질색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여기에서도 내가 남길 수 있는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처음엔 불가능해보였던 일을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나 스스로 3년간은 절대로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3년 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회사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구속력이 그때 소멸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강제적인 구속력이 없다면 그때 내 자유의지가 나를 더 좋은 곳으로 이끌 것이다. 다만 바라건대, 매일 아침 시끄러운 소리에 강제로 눈을 떠서 정해진 시간 동안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미친 짓을 평생 반복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 짓을 꼭 해야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적게 하고 싶다. 이 바람에 반하는 구속력이나 강제력이 내 삶을 지배할 수도 있다면 그 요인이 결혼이든 자식이든 나는 전부 포기할 의사가 있다. 10년 동안 백수로 살면서 진짜 그렇게 살아도 되겠냐는 질문에 혼자 많은 고민을 했지만 이제 나는 그에 대한 대답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반문으로 쉽게 되돌려 줄 수 있게 되었다.
|